나는 여러 개의 SNS 계정을 운영하고 있다. 2009년 트위터의 초창기 시절부터 운영한 X 계정과 그와 비슷한 시기 시작한 페이스북. 10년 전쯤 글쓰기에 집중하는 플랫폼이라는 취지가 마음에 들어 시작한 브런치. 2021년 영국 생활과 함께 시작한 인스타그램까지. 그리고 아주 최근의 스레드까지. 글을 기반으로 하는 주요 SNS마다 계정을 만들어 두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계정들에 들어가 보면 한 가지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을 팔로우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나름의 명확한 이유가 있다. 온라인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는 행위가 나의 삶에 전혀 이로울 게 없다는 확신이다. 즉, 나는 SNS에서 남의 일상생활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말하기에 앞서, 우선 당신이 SNS를 통해 남의 일상을 지켜볼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돌이켜보자. 당신과 그들의 삶을 비교하기 마련이다. 비교는 우월감이나 열등감 중 하나로 이어진다. 소속감이나 동질감을 그 둘과 별개로 봐야 한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들은 배타성이 합해진 우월감의 한 종류일 뿐이다. 우월감과 관련된 문제는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우선은 SNS에서 남의 삶을 엿보면서 갖게 되는 열등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남보다 내가 못하다는 감정. 남이 나보다 잘되고 있다는 불편한 사실을 마주할 때 끓어오르는 열등감은 곧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다. 불만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그 불만이 현재의 삶에서 원인을 찾아 고치고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때다. 이때는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결핍의 원인을 살피고 문제의 본질을 찾아내어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반대로 부정적인 쪽은 불만의 감정이 너무나 거센 나머지,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꺾어버리는 경우다. 이 상황에서는 다시 두 가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데, 하나는 좀 더 말초적이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결핍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경우다. 무리한다면 그 격차를 표면적으로나마 따라잡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처지에 맞지 않는 사치품을 사들이는 식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허영심을 충족하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었을 소중한 자원을 헛되이 소모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불만이 만드는 또 다른 부정적인 상황은 남의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는 경우다. 부러움을 느끼는 상대방과 자신의 격차가 너무 커서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 때가 여기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슈퍼카와 전용기를 소유한 스포츠 스타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그런 삶은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한다. 그렇게 잠깐 시간을 의미 없이 소모한 뒤 스마트폰 화면을 쓸어 올려 또 다른 자극적인 콘텐츠로 옮겨 간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현실의 소중한 자원, 특히 시간이라는 복구 불가능한 자원을 낭비한다.
SNS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늘 공존하지만, 사람과 환경에 따라 어느 한쪽이 우세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쪽이 우세해지는지는 이성과 감성의 힘겨루기로 결정된다. 우리는 감정이 이성에 미치는 영향이 그 반대에 비해 훨씬 크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나도 SNS에 전시된 타인의 삶이 편집된 것이라는 점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화려한 일상이 시각을 자극하는 순간 고개를 드는 부러움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SNS에서 다른 사람들을 팔로우하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그 반대는 어떨까? 내가 관찰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 말이다. 감사하게도 지난 5년여 동안 소위 ‘인스타그래머블’한 일들이 많았다. 방송 출연부터 외국에서의 생활까지. 어느새 나는 휴대폰 사진첩에서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릴 사진을 골라내고 있었다. 가능한 더 멋져 보이도록. 남들이 부러움을 느낄 수 있게. 사실 남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즐겼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나와 페이스북 친구 정도의 부질없는 연결 고리가 있는 누군가가 그 사진을 보며 느끼게 될 감흥을 미루어 짐작했다. ‘이 정도면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여기겠지.’ 그 누군가는 때로 연락한 지 십 년도 더 된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고, 바로 어제 직장에서 같이 점심을 먹은 동료이기도 했다.
남들은 경험하기 어려운 순간들, 운이 좋아서 얻게 된 여러 행운들. 그것들을 누리고 있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남들의 시선을 상상하면 짜릿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나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남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남이 부러움을 느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남이 내 사진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갖는지가 대체 왜 중요한가. 무엇보다 타인이 내 사진을 보며 갖게 될 인상이 나의 삶을 온전히 보여주는지 스스로 되묻게 되었고,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러고는 이내 허무함이 밀려왔다. 아주 세심하게 포착한 특별한 순간을 마치 나의 평범한 일상인 양 SNS에 올리는 행위. 그것은 과장광고이며 본질적으로는 남을 속이는 일이다. 나에게 남을 속이는 건 남에게 속는 것 못지않게 불쾌하다. 결국 나 또한 내가 경멸하던 기만적인 부류와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들은 모를지언정 나는 안다. 그 사실이 중요하다.
내가 SNS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진을 올리는 행위가 타인에게 초래할 결과도 결코 건강한 것이 못 된다. 바로 SNS의 부정적 영향인 일시적인 허영심 충족이나 무력감에서 오는 대리만족. 그것은 내가 남들을 팔로우하지 않음으로써 피하고자 했던 상황이다. 그러한데 내 SNS에 편집된 일상을 올림으로써 타인이 그런 상황에 빠질 여지를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겪고 싶지 않은 일을 남들이 겪게 하는 건 결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스스로 전시품이 되어야 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굳이? 왜? 여기서 숨 쉬고 살아가는 나는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다. 진열대에 놓여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뭐하러 애써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전시품을 자처하려 하는가? 남들이 느끼게 될 부러움에서 부스러기처럼 떨어지는 쾌감을 주워 먹기 위해서? 그런데 시간을 허비하기엔 하나뿐인 내 인생이 너무 소중하다.
그래서 요즘은 SNS에 사진을 업로드하지 않고 있다. 모르겠다. 언젠가 또다시 마음이 동하여 그저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정도의 의미로, 담백하게 근황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올리게 될지도. 하지만 당분간은 아닐 듯싶다. 남들의 SNS를 보면서 흔들리고 싶지 않듯이, 내가 올린 사진들로 저마다의 평범하지만 소중한 삶을 힘껏 살아가고 있는 타인들을 흔들고 싶지 않다. 흔들거나 흔들리거나, 둘 다 부질없는 일이다.

이메일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