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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사과하는 방법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현대인들은 그 이전 시대와 여러모로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 사람들은 소셜미디어라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서로와 연결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각자의 손바닥 위에 놓인 화면이 보여주는 극도로 개인에 맞춤화된 거품 속에서 산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는 사실이지만, 남이 보는 것을 내가 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내가 보는 것을 남이 볼 수 없다. 후자를 실감하는 게 더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조금이라도 관습의 선을 넘고 애석하게도 그것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순간, 사람들은 갑자기 자기 자신에 관한 관심을 내팽개치고, 감옥의 감시탑 경비들이 한밤중에 경계벽을 넘으려는 탈옥수를 발견하고 일시에 모든 조명을 그 앞으로 조준하듯, 시선을 그 한 사람에게로 집중한다. 이 극적인 방향 전환은 역설적으로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관계일지 모른다. 평상시에는 조그만 스마트폰에 묶여있느라 알게 모르게 느꼈던 갑갑함이, 어느 순간 누군가를 공공의 표적으로 삼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순간 폭발하듯 한꺼번에 협공에 나서는 듯하다.

예전 같았으면 매일 얼굴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회자되었을 법한 일들이 데이터 패킷에 실려 스마트폰과 스마트폰을 넘나들며 순식간에 범국민적인 분노의 거대한 파도를 이룬다. 이러저러한 개인의 신변잡기를 언론이라는 공공재를 동원해서 알리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언론은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했고, 그걸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주목해 버렸기 때문에, 결국 물의를 일으킨 당사자는 대중 앞에 ‘기분 상해죄’라는 죄목으로 끌려 나와 사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잠시 한 걸음 물러서서 차갑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게 그렇게 사과할 일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차마 여기서 그 구체적인 예를 들지는 않겠다. 괜히 섣부른 예를 들었다가 내가 그다음 논란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다만, 지금 머릿속에 누군가 나와서 공개 사과를 하는 최근의 어떤 뉴스 보도가 떠오른다면, 그리고 그 사과문에 “공인으로서…”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면, 적잖은 확률로 그것도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떠올리는 상황은 사람 수만큼이나 다를 텐데, 그런 일은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로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물의를 일으킨 주인공이 그 곤혹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고자 사과라는 힘든 일을 해 놓고도, 그 사과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정작 피해 당사자도 아닌) 대중의 분노를 불러오는 상황이다. 인간의 무리에는 어째서인지 잔인한 속성이 있어서 그들 앞에 누군가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볼 때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겨우 그 정도 사과로 지나가기에는 스스로 너무도 민감하고 고귀한 존재인 양 사과하는 이들을 더욱더 몰아붙이고 기어이 무너뜨리고자 한다.

그래서일까. 인터넷에는 ‘사과의 정석’이라는 글들이 지혜의 금언이라도 되는 듯 돌아다닌다. 가만 보면 대중들에게는 소심한 면이 있어서, 평소에는 익명성에 숨어서 타인을 윽박지르다가도, 혹여라도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떨치기 어려운가 보다. 예컨대 어떤 아나운서 출신 유명인의 글이 이러한 ‘사과의 정석’을 보여주는 모범 답안이라며 모름지기 사과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정리되어 있다. 사과 당사자가 무엇을 잘못했고 어떻게 재발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이미 일어난 피해를 어떻게 회복시킬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인터넷에 ‘사과의 정석’을 검색해 보면 가장 윗줄에 나올 테니 내가 여기서 그걸 다시 정리하지는 않겠다.

‘사과의 정석’의 내용은 설득력 있고 현실적이라 그것을 잘 따를 수만 있다면 분명 효과적일 것이다. 그 사과를 통해 사과를 받아 마땅한 상대방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을 터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사과의 정석’을 참고하기는 쉽지 않은데, 그런 상황에서는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조차도 무척 당황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내가 사과해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 ‘사과의 정석’을 떠올리고 실행에 옮길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어려운 매뉴얼 대신 좀 더 간단한 방법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방법은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사과의 순간에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간단한 요령이다. 내가 그동안 사업가로, 종합병원 의사로, 그리고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직접 그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사실 요령이라고 할 것도 없고 말투나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잘 기억해 둔다면 필요한 상황에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사과를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종종 이런 식으로 말한다.

“~ 때문에 불편을 드렸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자, 이런 말을 직접 당사자로서 듣거나, 혹은 관찰자로서 들었다고 해보자. 어떤 느낌이 드는가. 나는 왠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진다. 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보니, 저 말에는 말하는 이가 잘못을 했다면 사과를 한다는, 달리 말하면 잘못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과를 하기는 하는데, 동시에 사과를 안 해도 되는 상황에 대한 미련도 담겨 있다.

문제의 책임을 일부나마 상대방에게 미루겠다는 의지도 묻어나온다. 사과의 원인이 된 언행이 잘못된 일이라는 게 그것을 당한 이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사람에 따라서는 같은 일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불편을 느꼈다면’이라는 말은, 원인이 된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상대의 감정이 사과를 하게 된 이유라는 말이고, 이는 곧 상대가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면 사과할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기왕 사과를 하기로 한 상황에서, 가정법을 끼워 넣는 것은 구차하다. 또한 그것을 사과받는 이의 주관적인 견해로 치부하는 것도 당당치 못하다. 물론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아마도 사과를 하는 그 순간조차 사과하는 자신의 자존심을 잃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일 테다. 우리가 종종 잊는 것 중의 하나는, 사과를 하는 이도 사과를 받는 이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사과의 목적은 피해자의 감정을 치유하는 데 있는 것이지, 가해자의 감정을 해치는 데 있지 않다. 그렇다면 잘못한 점을 명확히 하고 책임 소재도 분명히 하면서도, 필요 이상의 저자세를 피할 수 있는 사과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다음과 같이 사과하는 걸 제안한다.

“~ 때문에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런 사과는 잘못을 가정법의 영역으로 돌리지 않는다. 사과받는 이의 주관적 견해로 미루는 구차함도 없다. 사과하는 입장에서도 잘못한 점에 대해서 사과할 뿐 그 이상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다. ‘불편을 드렸다면’ 상대의 눈치를 보고 상황을 달리 해석하는 권한을 넘기는 말이지만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는 비록 사과하는 입장이지만 상대가 부당하게 겪은 일에 대해 이쪽에서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다.

말투 하나 바꾼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결과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연락을 늦게 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는 “연락을 늦게 드린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와 다르다. “저희 직원이 실수했다면 사과드립니다.”는 “저희 직원이 실수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와 다르다. 사과하는 편과 사과받는 편, 그 어느 편에서 보더라도 후자가 훨씬 낫다.

우리는 소셜미디어라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물을 치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애초에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도록 선을 넘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한 처사일 터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항상 생각대로만 되지 않는 법. 혹여라도 선을 넘었다면 깔끔하게 사과를 하고, 동시에 사과를 할 때 지켜야 할 또 다른 선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자. 괜히 서로의 감정을 자극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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