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상의 썸네일을 보고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의 대학 교수들이 만날 때마다 푸념처럼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 대학교 분위기가 실로 가관이다. 학부모가 자기 자녀를 대신해서 성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건 흔한 일이고, 부모가 당일 결석을 전화로 알리는 경우도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거 참 큰 문제네요”라고 추임새를 넣으면서도, 정작 그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요즘 일부 부모들의 자녀 과보호가 큰 문제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사회적 병리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굳이 따져보지 않았다.
이 영상에서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과보호하는 그 마음 기저에는 ‘불안’이 있다고 말한다. 본래는 자녀가 감당해야 할 불안이지만, 부모가 자기 자식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기가 안타까운 나머지 그 불안을 대신 감당하여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게 그 요지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성적을 묻는 일, 오늘 몸이 안 좋아서 학교에 빠져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상황이 학생 입장에서는 실로 부담되는 일이다. 교수가 전화 너머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 불안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그래서 다 큰 어른이 그 부담스러운 상황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어쩌면 그 부모가 아이의 부담감을 미리 헤아리고 대신 나서서, 자신의 상황조차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김경일 교수는 불안을 자녀가 회피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감당하고 조절하며 결국에는 극복함으로써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녀의 불안과 그것이 겉으로 표출되는 방식인 짜증과 반항은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볼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이고, 이를 바꾸어 말하면 아이들이 느끼는 불안은 그들 나름대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건강한 반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이가 불안을 느끼는 건 자신의 앞날을 준비할 첫걸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걸 부모가 가로챈다면 아이는 자신이 배울 기회를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 가지 더. 부모의 경험은 오래된 것이다. 설사 부모가 아이에게 올바른 답을 준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이미 아이가 불안을 통해 배울 기회를 앗아가는 우를 범하는 것일 텐데, 그 답 자체가 유효기간이 한참 지나서 아이의 인생에 혼란만 야기하고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쓸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아이를 위하고 있다는 부모 자신의 이기적인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 아이의 앞길을 방해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불안은 스트레스의 한 종류이다. 나는 일전에 인간이 스트레스를 느끼는 원인을 ‘당면한 문제의 해결 방법을 모르는 상태’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리고 ‘공부’란 다름 아닌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공부란 가장 확실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그것은 술이나 담배 혹은 스마트폰 따위가 결코 대신할 수 없다. 스트레스와 마찬가지로 불안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그 원인을 해결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해법은 학업 성적, 진로, 친구 관계 등 아이들이 그들의 삶에서 겪을 수 있는 불안 요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은 그 불안을 아이들에게 부담시키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이 나서서 그 불안을 대신 떠안으려고 한다. 이는 결국 우리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불안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
요즘 딸아이의 학습 진도를 두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내는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딸이 내년 말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의 교과 과정을 따라가려면 지금부터 미리 좀 해두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특히 영어와 수학에 대한 걱정이 큰 것 같다. 그래서 딸의 영어는 아내가, 수학은 내가 전담하여 도와주기로 서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아내는 역시 아내 스타일대로 밀도 있게 영어 공부를 시키는 모양인데, 서로 역할을 나누기로 했으니 간섭하지는 않지만, 나는 내심 사실 그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신 수학은 내 담당이니 나의 방식을 적용하려고 한다. 내 생각은 그렇다. 아이에게 수학을 하라고 떠민다고 한들, 본인이 필요를 느끼지 않는 수학 공부를 백날 해봐야 머리에 남을 리가 없다. 차라리 한 발 물러서서 좀 지켜보다가, 자기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즉 자기가 한국에 돌아가서 수학 때문에 헤맬까 봐 불안해서 나에게 손을 내밀면 그제야 내가 “이건 네 수학 공부지만 아빠니까 좀 도와줄게” 하면서 선심 쓰듯 방향을 잡아줄 생각이다. 내가 먼저 나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아내에게 우리 부부가 어떻게 컸는지 돌아보자고 말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학창 시절 숱하게 병원 신세를 지면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잘 커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종종 하신다. 나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장인·장모님은 큰 간섭 없이도 학창 시절을 모범적으로 보낸 딸에 대해 늘 대견하게 생각하신다. 그런데 이 영상을 보고 나니, 어쩌면 우리 부부의 성장 과정을 달리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내가 본래 훌륭해서가 아니라, ‘자식의 불안을 대신 가져가지 않았던’ 부모님들의 믿음 덕분에,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고민하며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내와 나는 불안의 원인이었던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골몰했고, 때로는 넘어졌다가 또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면서, 그렇게 우리는 불안을 다루는 법을 배우며 어른이 되었다.
이제 딸의 불안은 딸의 몫으로 남겨둘 생각이다. 불안은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축복이니까 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불안할 기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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