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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발루 산행기 1부: 아내의 제안

여느 부부가 그렇듯 아내와 나는 서로 닮은 점도 많지만,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확연히 다르다. 나는 뭔가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내는 무엇이든지 말하기 전에 신중을 기하고 일단 선언한 것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현실로 이루어낸다.

가족 여행을 준비할 때 특히 그렇다. 어느 날 저녁을 먹다가 크루즈 타볼까 하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중해 한가운데에 떠 있는 18층짜리 크루즈선 후미에서 스크루가 만들어내는 물보라를 넋을 놓고 보고 앉아 있게 된다거나, 이름도 생소한 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만 한 달쯤 뒤에 거기서 셀카를 찍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덕분에 세상 구경을 많이 하게 된 것에 늘 감사하고 있다.

얼마 전 키나발루 산행의 시작도 다르지 않았다. 몇 달 전쯤 아내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키나발루 산에 가자고 말을 꺼냈다. 키나발루 산이라니. 나도 코타 키나발루(Kota Kinabalu)라는 지명은 들어보았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동남아 휴양지 중 하나라고. 그런데 앞에 코타를 뗀 키나발루가 산이라는 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동남아시아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니. 아무튼 지금까지의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반추해 보았을 때 머지않아 나와 딸이 아내를 따라서 그 산을 오르고 있을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확정된 미래라고나 할까.

싱가포르 부킷 티마 정상 표지석, 고도 163미터

사실 아내의 산행 계획이 갑작스럽진 않았다. 아내가 주재원으로 싱가포르로 온 지 2년 차. 가족 산행을 좋아하는 아내는 싱가포르에 높은 산이 없다는 걸 늘 아쉬워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높은 산인 부킷 티마(Bukit Timah)는 고도가 겨우 163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딸이 다니는 학원 근처에 있는 산이라서 나도 여러 번 가봤다. 싱가포르답게 등산로가 꽤나 잘 정비되어 있고 열대우림 특유의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지만,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한국에서 온 사람 입장에서는 영 싱거운 산이 아닐 수 없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는가 싶었는데 금방 정상 표지석에 도달한다.

그에 비하면 키나발루 산은 같은 산이라는 범주로 묶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높이다.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의 북동쪽에 위치한 키나발루 산은 최고 높이가 4,095미터에 이른다. 아내가 알아본 산행 일정은 1박 2일 동안 진행된다. 첫날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 전에 해발 3,272미터에 위치한 라반라타(Laban Rata) 산장에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정상으로 향한다. 한밤중이고 불빛 하나 없는 산속이므로 각자가 헤드랜턴을 쓰고 그 빛에 의지해서 올라가야 한다. 열대우림이지만 이 높이와 시간에는 섭씨 0도에서 5도를 오가고 바람도 많이 불기 때문에 복장을 단단히 갖춰야 한다. 그렇게 대략 아침 6시경에 정상에 도착해서 해돋이를 기다린다. 그 광경이 정말 기가 막히게 멋지다고 한다. 우리 가족 세 명에게 오래도록 남을 추억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내가 산행을 계획한 이유가 단지 산을 오르는 즐거움과 해돋이 감상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 여행에는 기러기 생활을 하는 나에 대한 아내의 위로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작년 초부터 시작된 아내의 싱가포르 주재원 생활은 우리 가족에게 뜻밖의 감사한 기회다. 그 덕분에 딸은 유년 시절에 더 다채로운 경험을 하면서 보내고 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 아내와 딸이 싱가포르로 떠나고 나는 부산에 혼자 남았다.

각오는 했지만, 현실로 마주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일상은 그저 힘겹다. 퇴근 후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느끼는 쓸쓸함, 매일 아침과 저녁 두 번이나 화상 전화를 하지만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한 달에 한 번 싱가포르로 향하지만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러 갈 때마다 또다시 한 달을 어찌 버티어 내야 하는가 하는 막막함이 있다. 나는 그저 이 3년이 어서 빨리 지나서 내년 말에 다시 가족이 모일 날만을 고대하고 있다. 그 점을 아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산행을 준비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아내의 그 마음이 고맙다. 아내, 딸 그리고 나까지. 이제 우리 셋은 산으로 간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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