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점심시간이었다. 메뉴가 꽤 괜찮은지 구내식당 앞 대기 줄이 평소보다 길었다. 같이 온 동료들과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며 지난 주말 다녀온 곳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대화라는 게 화제가 소진되면 흐름이 끊기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그 적막이 어색하여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딱히 용무가 있어서는 아니다. 이미 확인한 카톡도 다시 열어보고 네이버 뉴스도 열어본다. 아니나 다를까, 옆의 동료도 스마트폰 화면 위의 뭔가를 열심히 손가락으로 쓸어올리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과 그 안의 여러 앱들은 분명 전에 없던 편리함을 제공한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평소에 만나지 못하는 소중한 이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 유튜브는 방송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하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종종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과 그 안에 깔려 있는 앱들이 주는 즐거움 뒤에서 소리 없이 따라온 문제점들을 목도하고 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평생 만날 일 없는 타인들의 가공되고 편집된 일상을 구경하는 데 우리의 하나뿐인 소중한 삶을 소진시키는 시간 분쇄기가 되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몇 개 안 되던 TV 채널의 드라마를 보고 학교와 직장에서 화제 삼던 사람들은 이제 저마다의 유튜브 알고리즘에 갇혀서 남들이 무엇을 보고 듣는지 전혀 모른 채 살고 있다.
플랫폼은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해 설계되었다. 사람들이 만족해야 그 생태계 안에 오래 머물고, 그동안 더 많은 개인 정보를 남기며, 플랫폼 회사는 그 정보를 광고에 활용해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개개인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플랫폼으로서는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콘텐츠를 그들의 시야에서 치워버리는 게 목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을 수 있)기에, 그렇게 소거된 불만족스러운 견해들이 실은 소중한 조언일 수도 있다.
그렇게 플랫폼은 사람들의 시야를 묶어둔다. 자신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의 영상을 접해서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기가 알고 있는 역사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견해를 접해서 혼란을 겪지 않도록. 지금까지 사실이라고 믿어온 것에 대한 반론을 진중하게 검토해 보기보다는 믿고 있는 게 틀리지 않았다는 공감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도록. 그래서 ‘역시 나는 옳아’라고 생각하며 만족하도록. 그리고 그 만족이 주는 쾌감이 떠나가지 않도록,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도파민에 계속 절어 있도록. 또 어딘가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그 반대되는 의견에 둘러싸여 역시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가만 보면 페이스북과 유튜브는 마치 이쪽에 와서는 이 말 하고 저쪽에 가서는 저 말 하면서 사람들끼리 싸우도록 부추기는 이간질쟁이 같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독일의 심리학자 네시베 카흐라만(Nesibe Kahraman)은 책 『인생의 모호함에 관하여』에서 우리가 선과 악,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면 ‘모호성 수용’을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모호성 수용이란 세상에 옳고 그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 지대도 존재함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주제는 이 책의 원제 ‘Alles, was dazwischenliegt’에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말로 옮기면 ‘그 사이에 놓인 모든 것’쯤 된다.
모호성 수용이라는 개념의 뿌리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오스트리아 출신 심리학자 엘제 프렌켈-브룬스비크(Else Frenkel-Brunswik)는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을 처음으로 연구하며 모호성 수용과 권위주의적 성격이 서로 반대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밝혀냈다. 쉽게 말하면, 모호성을 수용하는 사람일수록 권위주의에 반감을 갖고, 그렇지 않은 사람일수록 권위주의에 휩쓸리기 쉽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라”고 말했는데, 나는 이를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사실 그 자체도 하나의 권위일 수 있다는 경고로 읽는다. 저자는 바로 그 문제의식을 오늘의 일상으로 가져온다.
저자의 직업은 심리치료사다. 그는 2020년부터 심리치료소를 운영하며 많은 내담자를 만나왔고, 이 책 역시 그가 만나서 상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한때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의 약해진 모습을 마주한 딸의 사연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미워해야 할지 가엾게 여겨야 할지 혼란스러워하지만, 저자는 둘 중 한 가지를 골라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미움과 가여움은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동경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녀는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떤 가족을 보며 그들의 삶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저자와 상담을 이어가며, 정작 그 가족의 누군가에게는 바로 그 상황이 불행의 원천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에서 ‘관점주의(Perspektivismus)’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진리가 바라보는 자의 관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저자도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세상의 한 단면일 뿐임을 강조한다.
미움과 연민, 동경과 현실. 우리는 삶에서 마주하는 이런 이중성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그것을 단순화하여 하나를 선택한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단순화는 세 가지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하나는 세상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 또 하나는 모호한 것을 밀어내는 배척, 마지막은 내 안의 불편한 면을 남에게 덧씌우는 투영이다. 견디기 힘든 현실을 단순화라는 손쉬운 해법으로 처리하려고 할수록 왜곡된 관점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 인지적 유연성이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마음이다. 모호함을 견딜 수 있어야 내가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할수록 모호함도 더 잘 견딜 수 있다. 이처럼 인지적 유연성과 모호성 수용은 서로를 강화한다. 저자는 우리가 이를 통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견뎌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모호한 것들을 수용해야 할까. 저자는 또 다른 사연을 가져와서 이에 답한다. 청소년에게 폭력 예방을 가르치는 강사가 있다. 그는 학교 밖에서는 훌리건이 되어 패싸움을 벌이는 이중적 삶을 살아간다. 그 두 가지 삶 모두가 그 사람에게는 나름의 가치를 갖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벌이는 폭력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이어서 종교적 신념을 앞세워 아이의 자유를 제약하는 이슬람주의자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이 사연을 통해 타인의 신념을 존중하는 일과 그 신념이 누군가를 억압하는 것을 용인하는 일은 다르며, 모호성 수용을 이유로 부당한 억압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처럼 모호성 수용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으며,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도 없다. 저자에게 모호성 수용이란 자기 성찰을 위한 여러 도구 가운데 하나다. 자기 성찰은 다시 사회의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분법을 넘어설 때 우리는 비로소 증오와 차별, 경직된 권위주의에 맞설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프렌켈-브룬스비크가 80년 전에 인간의 맹목적 믿음을 향해 던졌던 문제의식으로 돌아간다.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처음에 등장했을 때 ‘이런 것도 할 수 있네’라는 감탄을 자아냈다. 이제는 점점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러면 그만큼 한 발 앞서간 인공지능이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인간은 못해도 ‘인공지능은 할 수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프롬프트를 채우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인공지능이 없던 세상으로 돌아가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세상과 연결되게 도와준다는 기술, 더 손쉽게 지식을 얻게 해준다는 도구가 실제로는 무지와 고립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책의 한 구절을 빌리면, 문제는 답이 아니라 이런 질문이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이 인류를 파멸시킬지 모른다는 인공지능 전문가들의 경고가 부쩍 잦아졌다. 미국에서는 양심선언을 하면서 회사를 뛰쳐나오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그러한 뉴스를 보아도 일부의 과도한 우려 내지는 설레발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터다. 하지만 지난달과 이번 달이 다르고, 작년과 올해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를 목도하면서 그들의 경고가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챗GPT와 제미나이에서 번갈아가며 새로운 모델이 나왔다는 소식이 뉴스를 타고, 최근에는 메타에서 쇼핑부터 불필요한 구독 정리까지 알아서 해주는 뮤즈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지금 쓰고 있는 클로드의 기능도 다 알지 못하는데, 새로 나온 건 또 언제 활용법을 익혀야 하는지, 과연 익힐 수는 있는 것인지, 이제는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내년, 몇 년 뒤, 그리고 초등학생인 내 딸이 어른이 될 무렵에 인공지능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나는 어떤 미래가 그려져서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떠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상황 자체가 무섭다.
다만 한 가지 예상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미 페이스북과 유튜브가 증명했듯, 우리들 대다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습성이 있다. 스마트폰에 깔려 있는 앱들은 저마다 다른 기능과 모습을 갖고 있지만 바로 그 목적에 충실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들 수많은 앱들의 본질은 결국 알고 싶은 것을 알게 해주는 도구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한정된 시간을 알고 싶은 것을 아는 데 최대한 쓰도록 장려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알고 싶지 않은 것에 쓰는 시간을 지워나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인공지능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그 자리에서 알려주는 시대가 되었다. 페이스북과 유튜브에는 그나마 타인이 존재했다. 이제는 그 타인조차 사라지고 친절하고 유능한 인공지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인공지능이 일상에 침투할수록 우리의 세상에 대한 관점은 점점 더 파편화되고 서로에게서 고립될 우려가 크다. 인공지능의 속삭임에 둘러싸인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알 수 있다고 착각한 채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어쩌면 인공지능이 인류를 파멸시키는 과정은 흔히들 상상하듯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이 인간을 공격하거나 통제하는 방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각자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상을 다 이해한다고 착각하고, 이쪽 아니면 저쪽만이 있을 뿐 그 중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망각한다면, 그러한 상황이야말로 인류가 마주하게 될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모호성 수용이 더욱 절실한 이유다.
그 중간 지대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인생의 모호함에 관하여』는 그렇기에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묵직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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