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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내 자리를 위협한다고 느낄 때 읽어야 할 책 다섯 권

2013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칼 프레이와 마이클 오스번은 20년 안에 현재 직업의 47퍼센트가 사라질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과장된 경고라는 반론도 많았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숫자가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따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 다른 종류의 질문이 새로이 떠올랐다. 기계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코드를 짜는 시대에 인간이 하는 일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불안은 대체로 모르는 데서 온다.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는지 알 수 있다면 두려움은 이해로 바뀐다. 이 다섯 권은 그 이해에 이르는 길이다.

경험의 멸종

경험의 멸종 책 표지. 크리스틴 로젠 지음, 이영래 옮김, 어크로스 출간. 부제는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아내가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떠나고 딸과 함께 출국장 너머로 사라지던 날, 3년이라는 시간이 아득했다. 그 시간을 견디게 해준 것이 하루 두 번의 화상 통화다. 아침에는 딸이 셔틀버스에 오르는 것을 화면으로 지켜보며 손을 흔들고, 밤에는 각자의 하루를 늘어놓다가 기도를 올리고 잠자리로 향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화상 전화는 영화 속 기술이었다. 그런데도 통화를 끊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적막이 밀려든다. 화면 너머의 활기와 대비되는 혼자만의 공간은 가끔 가혹할 정도로 고요하다.

그 공허함의 정체를 크리스틴 로젠 (Christine Rosen)의 『경험의 멸종』 (The Extinction of Experience)에서 찾았다. 내가 마주한 것은 아내와 딸의 실재가 아니라 그들의 모습을 옮겨온 복사본이었다. 매개 기술은 결과물은 넘겨주지만 과정은 넘겨주지 못한다. 날씨 앱이 기온은 알려줘도 얼굴에 닿는 습기와 바람의 냄새는 알려주지 못하듯이. AI가 글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는 있어도, 그 결론에 이르는 사유의 길을 대신 걸어주지는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경험의 본질은 완성된 글이 아니라 쓰는 과정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술이 줄 서기와 손 글씨와 길 찾기 같은 시간이 걸리는 일들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재정의해 왔다고 지적한다. 매개가 덜어낸 것은 번거로움만이 아니었다. 진짜 경험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AI에게 자리를 빼앗길까 두렵다면, 먼저 빼앗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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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역사

AI의 역사 책 표지와 저자 토비 월시의 사진

세상은 AI가 앞으로 얼마나 빠르게 발전할 것인가를 말한다. 그런데 그 말 속에는 이미 얼마나 빠르게 변해버렸는가라는 뜻이 숨어 있다. 속도는 지나온 거리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어디서 출발했는지 모르면 지금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지도 알 수 없다. 언젠가부터 백미러 없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담론 속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토비 월시 (Toby Walsh)의 『AI의 역사』 (The Shortest History of AI)는 그 백미러 역할을 한다. 1956년 다트머스 워크숍에서 시작된 기호의 시대, 기계가 데이터를 스스로 해석하기 시작한 학습의 시대,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에 근접한 생성형 AI의 시대까지. 저자는 반세기의 궤적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낸다. 기술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지능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떻게 재정의되어 왔는지, 그 안에 인간의 어떤 욕망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는지를 함께 읽어낸다. 세부 기술을 몰라도 괜찮다. 기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되짚어보면 지금의 풍경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예언이 아니라 성찰이고, 두려움이 아니라 이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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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시대, 인간의 일

노란 배경에 로봇과 기계를 주제로 한 책 표지, 제목은 '로봇 시대, 인간의 일'이며, 아래에 인용구와 저자명이 적혀 있음.

30년쯤 전, 컴퓨터에 음성 명령을 가르치는 일에 며칠씩 매달린 적이 있다. 시작, 확인, 취소, 실행. 그 정도의 단어를 알아듣게 하는 것이 당시의 최첨단이었다. 주변 소음을 모두 없애고 마이크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한 마디씩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사실 키보드를 치는 편이 훨씬 빨랐다. 그래도 모니터의 음파 그래프가 내 말에 따라 움직이는 광경은 신세계였다. 강아지에게 앉아와 일어서를 가르치는 기분에 가까웠다. 그 기술이 지금은 주머니 속 휴대폰에 들어와 있다.

기술이 편리해진 만큼 사람의 자리는 좁아졌다. 구본권의 『로봇시대, 인간의 일』은 그 좁아진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저자의 답은 명료하다. 로봇과 경쟁해서 이길 방법을 찾는 것은 틀린 질문이다. 로봇이 들어올 수 있는 영역이라면 그곳이 로봇의 차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로봇이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은 무엇인가. 그리고 로봇이 번거로운 일을 해주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저자는 그 답으로 도덕적 감정과 여가의 활용을 든다. 안락사를 허용할 것인가, 성장이 먼저인가 분배가 먼저인가. 이런 물음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기계에 맡길 수 없다. 그리고 그 답은 각자가 자기 직업에 비추어 스스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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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이후의 세계

AI 이후의 세계 표지

챗GPT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랬다. “이게 된다고?” 기대와 당혹감이 뒤섞인 그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인류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로 성큼 들어섰다. 원했건 아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되돌아갈 길은 없다.

헨리 키신저 (Henry Kissinger), 에릭 슈밋 (Eric Schmidt), 대니얼 허튼로커 (Daniel Huttenlocher)가 함께 쓴 『AI 이후의 세계』 (The Age of AI)는 정계와 재계와 학계를 대표하는 세 사람이 4년에 걸쳐 논의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 책의 진가는 답이 아니라 질문에 있다. 저자들은 저마다의 분야에서 최고에 오른 사람들인데도 인공지능이라는 주제 앞에서 단정하기를 주저한다. 대신 책의 상당 부분을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에 할애한다. 나는 그것이 의례적 겸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느꼈다. 저자들의 경고는 서늘하다. 경쟁에서 이기려는 인간의 욕심이 인공지능을 통제 범위 밖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는 것.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할 수 있으니 해도 되는지를 묻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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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문학적 감각인가

책 표지: '왜 인문학적 감각인가'라는 제목이 크게 적혀 있으며, 하단에 저자명과 번역자명이 기재되어 있는 디자인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경고가 쏟아진 지 오래다. 직장인이라면 지금 이 일로 10년 후에도 먹고 살 수 있을지 고민해 봤을 것이다. 부모라면 뛰노는 아이를 보며 이 아이가 커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걱정해 봤을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군더더기를 걷어내면 화두는 하나로 모인다. 앞으로 인간의 역할이 무엇인가.

역사를 보면 인간은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것을 풀기 위해 학문을 만들었다. 무질서를 해결하려고 법학을, 오래 살고 싶어서 의학을, 도구를 잘 쓰려고 공학을 만들었다. 인간의 역할에 답하는 학문도 있다. 성격이 조용하고 담백하다 보니 바로 옆에 두고도 존재감을 잊고 지냈을 뿐이다. 그 이름이 인문학이다. 조지 앤더스 (George Anders)의 『왜 인문학적 감각인가』 (You Can Do Anything)는 인문학이 아무것도 훈련시키지 않지만 모든 것을 준비시킨다고 말한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아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 그것이 인문학이 길러주는 경쟁력이다. 나는 여기에 세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는 인습타파, 남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역지사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살피는 자아성찰. 공교롭게도 이 셋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가질 수 없는 관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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