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올해 펴낸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6에는 눈여겨볼 숫자가 있다. 매주 인공지능 챗봇으로 뉴스를 접하는 사람의 비율이 전 세계적으로 1년 사이 7%에서 10%로 늘었는데, 한국은 14%로 튀르키예와 함께 가장 높은 축에 속했다. 그런데 챗봇 이용자 가운데 답변을 보고 원문 기사로 자주 넘어가는 사람은 42%에 그쳤다. 한편 한국인의 뉴스 신뢰도는 30%였고, 소셜미디어를 주요 뉴스 경로로 꼽은 비율은 9%에서 21%로 크게 늘었다.
말하자면 기사를 직접 읽고 판단하기보다 누군가 정리해 준 결론을 받아 드는 일이 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편리하다. 하지만 내가 고른 플랫폼과 내가 던진 질문을 거쳐 온 결론은 아무래도 내가 듣고 싶던 쪽으로 기울기 쉽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 든 결론은 어느새 내 생각이 되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고정관념이라고 부른다.
고정관념은 대개 남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의심하기 어려운 것은 평균, 통계, 지식처럼 너무 당연해서 따져 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 기준들이다. 여기 다섯 권은 바로 그 기준을 다시 따져 본 책이다.
평균의 종말
1950년대 미국 공군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비행기 사고가 잇따랐다. 당시 조종석은 평균적인 조종사의 몸에 맞춰 설계되어 있었다. 그런데 길버트 대니얼스 (Gilbert S. Daniels)가 조종사 4천여 명의 신체를 열 개 항목으로 측정해 보니, 열 개 항목 모두 평균 범위에 드는 조종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평균에 맞춘 조종석이 실은 누구에게도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좌석과 페달을 조종사에 맞춰 움직이게 바꾸자 사고는 비로소 줄어들었다.
하버드 교육대학원 교수를 지낸 토드 로즈 (Todd Rose)는 이 일화에서 출발해 평균적인 인간이란 허구라고 단언한다. 그런데도 평균은 학교에서 직장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가르는 기준으로 군림해 왔다. 그 뿌리를 따라가면 평균을 이상으로 여긴 19세기 통계학자 케틀레 (Adolphe Quetelet), 평균에서 벗어난 정도로 우열을 가른 골턴 (Francis Galton)이 나온다. 이어서 그 발상을 공장으로 옮긴 테일러 (Frederick Winslow Taylor)와 학교로 들여온 손다이크 (Edward Thorndike)가 등장한다. 그 대안으로 저자는 세 가지 원칙을 내놓는다. 사람의 재능은 영역마다 들쭉날쭉하고, 성품은 맥락에 따라 달라지며, 같은 목표에 이르는 경로도 여러 갈래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선행’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앞지른다는 말은 평균이라는 기준을 전제한다. 기준이 사라지면 앞선다는 말도 의미를 잃는다. 4세 고시, 7세 고시라는 말이 나도는 지금, 한번 짚어 볼 대목이다. 공직 사회도 다르지 않다. 공무원이 해마다 채워야 하는 상시학습 시간 역시 평균적인 공무원을 상정한 표준화 교육에 가깝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평균이 무너지는 시대에 평균을 가장 잘 계산하는 기계가 등장했다. 사람이 그 기계와 다른 자리에 설 수 있는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갈린다.
플랫폼은 사람들이 만족하도록 설계된다. 사람들이 만족해야 그 안에 오래 머물고, 그동안 남긴 개인 정보가 광고 수익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랫폼은 불편한 견해를 우리 시야에서 조용히 치운다. 나와 다른 정치적 견해, 내가 알던 역사가 틀렸을지 모른다는 반론은 점점 보이지 않고, 대신 ‘역시 나는 옳아’라는 만족감만 남는다. 가만 보면 페이스북과 유튜브는 이쪽에 와서는 이 말 하고 저쪽에 가서는 저 말 하는 이간질꾼 같다.
그렇다면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독일의 심리치료사 네시베 카흐라만 (Nesibe Kahraman)은 이분법에서 벗어나려면 ‘모호성 수용’을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옳고 그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 지대도 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원제 Alles, was dazwischenliegt, 우리말로 ‘그 사이에 놓인 모든 것’에 그 주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개념의 뿌리는 1940년대 심리학자 엘제 프렌켈-브룬스비크 (Else Frenkel-Brunswik)에게 닿는다. 그는 모호함을 견디는 사람일수록 권위주의에 반감을 갖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물론 모호성 수용이 무엇이든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저자는 청소년에게 폭력 예방을 가르치면서 학교 밖에서는 패싸움을 벌이는 강사의 사연을 들려준다. 그의 이중적인 삶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가 휘두르는 폭력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이처럼 모호성 수용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닌 자기 성찰의 도구다. 그런데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인공지능을 떠올렸다. 흔히 인공지능의 위협이라고 하면 기계가 인간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다. 그러나 내가 떠올린 파멸의 모습은 그보다 훨씬 조용했다.
언제부터인가 뉴스마다 ‘팩트 체크’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사실을 확인하겠다는 말이지만, 그 사실이란 대개 다른 사람의 주장을 가리킨다. 현실에서 팩트 체크란 결국 ‘지금 저쪽이 하는 말이 과연 사실인지’ 파헤쳐 보겠다는 것이다.
통계학자이자 의사인 한스 로슬링 (Hans Rosling)은 아들 올라 로슬링, 며느리 안나 로슬링 뢴룬드와 함께 이 책에서 세상에 대한 오해를 통계로 바로잡으려 한다. 그 오해란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통념이다. 저자들은 책 첫머리에 극빈층 비율이나 기대 수명처럼 세상에 관한 13개 질문을 던진다. 선택지는 셋씩인데, 사람들의 정답률은 10% 안팎에 그쳤고 이른바 지식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골라도 33%를 맞힐 침팬지보다 못한 셈이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세상이 실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로슬링은 이 책을 마무리하던 2017년 초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개운치 않았다. 사실이 통계로 가공될 때 어떤 부분을 재료로 삼을지 고르는 단계에서 이미 주관이 개입한다. 그 통계를 해석할 때, 그리고 해석에서 주장을 끌어낼 때 다시 한 번씩 주관이 끼어든다. 요컨대 저자들이 사실이라고 내민 통계 역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저자들이 고르고 해석한 결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 팩트 체크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내가 내린 답은 상대방이 아니라 거울 쪽을 향해 있다.
나 역시 여러 매체에 글을 쓰며 인공지능이나 새로운 의료기술이 가져올 변화에 기대를 담은 적이 있다. 기술의 발전이 사회 문제를 풀어 주리라는 전망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어떤 기술도 물리적 조건과 에너지 체계 위에서만 작동한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에너지와 산업 문명의 역사를 연구해 온 바츨라프 스밀 (Vaclav Smil)은 미래를 약속하기보다 지금의 세계가 어떤 조건 위에서 유지되는지를 차분히 보여준다. 이를테면 우리가 먹는 식량조차 햇빛과 토양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석유와 석탄, 천연가스와 전기를 거쳐야 비로소 식탁에 오른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앞으로도 형태만 달라진 화석연료를 소비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현실의 복잡함을 도덕적 이미지로 단순화하는 일부 환경 운동에도 비판적이다. 친환경의 상징인 전기차조차 막대한 에너지 생산과 세계적 공급망 위에서만 굴러가기 때문이다.
한편 후반부의 위험에 관한 논의도 인상 깊다. 우리는 사고와 질병, 재난 소식을 끊임없이 접하며 점점 더 위험한 시대에 산다고 느낀다. 그러나 저자는 정보의 반복과 과장이 위험을 실제보다 크게 느끼게 만든다고 짚는다. 앞서 소개한 팩트풀니스가 세상이 생각보다 나아지고 있다며 비관을 누그러뜨렸다면, 이 책은 쉽게 믿어 버린 낙관을 경계하게 만든다. 저자는 스스로를 낙관론자도 비관론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 뒤로 나는 새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질문 하나를 먼저 던지게 됐다. 그 기술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안다는 것에는 몇 겹의 의미가 있다. 나는 블로그에 글을 쓰는 법을 알고, 그 사실도 안다. 반대로 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모르고, 모른다는 사실도 안다.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자신감으로,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겸손과 배움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모른다는 것조차 모를 때다. 주식을 잘 모르면서 안다고 믿고 무모하게 투자하는 사람,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지식을 귀한 조언이랍시고 건네는 사람이 그렇다.
인지과학자 스티븐 슬로먼 (Steven Sloman)과 필립 페른백 (Philip Fernbach)은 바로 이 상태를 ‘착각’이라고 부른다. 모르는 것이 무지라면, 그 무지 자체를 모르는 것이 착각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더닝 크루거 효과다. 코넬대학교의 데이비드 더닝 (David Dunning)과 저스틴 크루거 (Justin Kruger)가 제안한 이론으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대학원 시절 들었던 우스갯소리가 떠오른다. 학부생은 다 안다고 생각하고, 석사가 되면 모르는 것도 많다고 깨닫고, 박사가 되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느낀다. 그리고 교수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데 자기가 말하면 다들 믿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저자들이 착각을 나쁘게만 보지는 않는다. 모르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고, 거기서 뜻밖의 성취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이란 허무할 만큼 얄팍하면서도 동시에 무한히 강력한 셈이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누구에게 권하면 좋을지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멈칫했다. 그 이유를 알고 나면 이 다섯 권을 읽는 방식도 조금 달라질지 모른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믿다가 어느 순간 틀렸다는 걸 알게 된 생각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