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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더위, 물 한 잔의 권리

점심을 먹고 보건소로 돌아오니, 1층에 어르신 몇 분이 앉아 계셨다. 진료를 보러 온 것도,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며칠 사이에 부쩍 기온이 오르자 그저 잠깐 더위를 피해 들어온 분들이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분, 부채질을 하는 분, 등을 의자에 깊이 기댄 채 눈을 감은 분. 다들 힘겨워 보였다. 나는 정수기의 물을 권했다. 어르신들은 종이컵에 물을 받아 천천히 비웠다. 한 분은 두 잔을 드셨다. 그제야 표정이 조금 편안해 보였다.

마음에 걸린 것은 그분들 중 누구도 목이 마르다고 먼저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을 권하니 그제야 반갑게 받아들었을 뿐이다. 나이가 들면 갈증을 느끼는 중추 기능이 둔해진다. 몸에 수분이 부족해지는데도 뇌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목이 말라야 물을 찾는데, 그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더워지는 여름이 노인에게 더 위험한 이유다. 잠시 숨을 돌린 어르신들은 가방을 챙겨 하나둘 문을 나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현장의 보건의료 책임자로서 여름철 온열 환자를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처방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충분한 수분 섭취를 든다. 누구나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는 예방책이기 때문이다. 여름철이 다가오면 물을 자주 마시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리는 이유다. 다만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근처 편의점까지 걸어가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게 문제다. 거리마다 권고만 넘칠 뿐 정작 마실 물은 없다.

그렇지 않은 도시도 있다. 부산보다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우리가 조만간 마주할 미래의 여름을 1년 내내 겪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외출할 때 텀블러 하나만 들고 나오면 마실 물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다. 공공장소마다 누구나 무료로 물을 받을 수 있는 식수대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운 날씨에 물을 충분히 마실 수 있는 환경이 시민의 건강에 직결된다는 것을 싱가포르 사람들은 알고 있는 듯하다.

나의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한때 우리 거리에도 그런 곳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것을 밀어낸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불신이었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태는 수돗물에 대한 신뢰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사람들은 가정과 직장에 정수기를 들여놓았고, 밖에서는 생수를 사 마셨다. 그러면서 공공 급수대는 시야에서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이 공공 급수대를 외면하자 지자체는 위생 문제와 관리 비용을 이유로 시설을 거두었다. 그렇게 우리는 거리에서 물 마실 곳을 잃었다.

이제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를 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편의점뿐이다. 돈을 내지 않으면 물 한 모금도 없다. 종일 햇볕 아래서 일하는 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사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폭염을 견디기 위한 물값이 생존을 위해 내야 하는 세금이 되었다. 물을 마실 권리, 생존의 기본권이 어느새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된 것이다. 이제는 이것을 다시 원래 있어야 마땅한 상태로 돌려놓아야 한다.

부산은 시민에게 안전한 물을 건넬 저력이 있는 도시다. 부산의 식수는 낙동강에서 온다. 낙동강은 상류의 오염 부담을 늘 안고 있다. 그래서 부산시는 일찍부터 까다로운 정수 기술을 키워 왔다. 강물을 안전한 물로 바꾸는 노하우를 꾸준히 쌓아 온 것이다. 과거 수질 오염 사고를 겪은 부산이 이를 극복한 기술로 거리마다 누구나 마실 물을 시민에게 돌려준다면 어떨까. 그것은 한 도시가 한때의 아픈 기억을 시민을 위한 자산으로 승화한 역사가 될 것이다.

다행히 부산은 이미 첫발을 내디뎠다. 부산시 상수도사업본부의 찾아가는 순수365 음수차는 폭염 취약지역을 직접 찾아가 시원한 병입수를 건네고 주민의 안부를 살핀다. 나는 보건의료라는 다른 영역에 몸담고 있지만, 그 취지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더위 속에서 신음하는 누군가의 건강을 지켜 내는 데 큰 기여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다. 공공장소마다 촘촘하게 식수대를 마련하여 시민 누구나 물병에 깨끗한 물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온천천 산책로부터 여름철마다 사람이 붐비는 해운대 해수욕장까지, 사람들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단정한 식수대가 서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 시민들이 텀블러에 물을 채울 때마다 화면에는 실시간 수질이 파란 숫자로 떠오른다. 우리 도시가 건강하게 지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이보다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기후학자들은 올해 여름이 앞으로 맞이할 여름 가운데 가장 시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더위가 해가 갈수록 심해진다는 뜻이다. 우리 도시의 거리에 누구나 자유롭게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을 갖추는 일은, 앞으로 다가올 모든 여름을 위한 준비다. 보건소 밖으로 나서던 어르신들의 뒷모습을 다시 떠올린다. 정수기에서 담아 마셨던 물 한 잔을, 이제는 우리 도시가 건넬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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